2025 생각지대 중심 생각
프락시스: 행동을 위한 건축, 건축을 위한 행동
2025년 생각지대는 단체의 핵심 이념인 행동주의에서 출발하여,
건축가 자신과 단체, 그리고 건축 자체의 사회-내-존재를 드러내는 근본물음을
행위에 대한 실천적 고찰을 통해 던지고자 한다.
이론과 실천의 구분, 대립 그리고 화합은 사회적 실천을 모색하는 모든 사상과 단체들에서 필요 불가결한 문제로, 실천의 노선을 결정하는 데 주요한 분기점이다.
그간 건축 내에서, 이론과 실천 사이를 매개할 실천적 지혜phronēsis의 여러 차원 중에서 줄곧 강조되어 온 것은 포이에시스poiēsis였다.[1] 언제나 지어지는 것들이 건축으로 논해지고, 사회 환경의 대지 위에 이루어지는 예술적 생산 노동으로서 건축의 ‘목적’과 ‘가치’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이는 비트루비우스가 정의한 건축의 세 가지 요소 ― 견고함firmitas, 유용함utilitas, 아름다움venustas[4] ― 로 대변된다.
반면 이러한 건축의 고전적 방법론을 확장하기 위해 근대에 대두된 ‘건축으로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유토피아주의, 또는 세기말 크게 확산하였던 건축의 위기 의식과 그 방어기제로서 나타난 다른 분과학문 간의 무분별한 통섭과 환원주의라는 ‘사회로 건축을 바꾸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났다. 자연스럽게 이는 다시 반작용으로서 ‘순수한 건축’를 논하고 지키고자 하는 포스트 담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편으로 오늘날 도처에서 목도되는 사회의 위기는 학생이자 시민인 우리 자신들에게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는 의식과, 그에 따라 단결된 방향으로의 급진적 실천을 시대정신으로서 요구하는 듯하다. 신자유주의는 이미 견고한 체계를 갖춘 채 세계적 표준global standard 이 되어 사회의 모든 영역을 자본의 논리 하에 편입하고 있지만, 저항의 주체가 되어야 할 시민사회와 피억압계층 내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국가를 막론하고 극단주의와 대중주의가 세력을 넓혀가고 있고,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공론장은 현실 공간에서 무너져 소멸할 위기에 처해 있다.
이에 건축가들이 나서서 자본과 권력에 종속되어왔던 기존의 관계 구조를 철폐함으로써 도시와 사회 환경에 대한 권리를 되찾고 비로소 책임을 지기 위해, ‘중립’으로 흔히 오해되는 자폐적이고 탈비판적인 사회관에서 벗어나 명확한 이념ideology을 가지고 실천해야 한다는 요구는 실로 충분한 당위성을 가진다.
그러나 노선이 옳고 그름을 떠나, 조직적 역량과 사회 내 영향력이 턱없이 부족한 지금의 학생사회와 건축계 전반의 상황에서는, 이념이 행위의 방향성을 결정하며 행위의 목적을 행위 외부, 특히 행위 주체 내에서 찾아야 하는 목적지향적 실천은 그저 소극적인 방향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취해서는 현재 단계에서 사회 내에서의 유의미한 파급력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창단 이후 지난 3년간 생각지대는 이제 막 태동하는 단체로서는 적지 않은 수의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과 교류하며 미약하게나마 그 활동의 범위를 넓혀가는 데 힘써왔다. 다만 현재 건축 자체가 그렇듯 생각지대 또한 단체로서 ‘어떤 방식으로 사회 내에서 드러나는지’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에 우리는 건축가 자신과 우리 단체, 그리고 건축 자체를 실천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포이에시스의 관점에 머무르지 않고, 프락시스praxis, 즉 행위 자체로서 행위의 추구를 통해 우리가 가진 불안Angst과 위기를, 세계를 향해 존재를 드러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 개념을 해석하며, 실천적 지혜가 타인과 사회 내 다른 존재들에 대한 ‘함께 있음의 정서’, 즉 배려Sorge 에 기반하여, 관심을 갖고 신중하게 현재를 둘러볼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숙고bouleusis는 단순히 현재 보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게 되었는지와 관련된 과거를 비롯해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에 관한 미래와도 관계하게 된다. 이렇게 매개된 행위는 과거-현재-미래라는 공존할 수 없는 시간성과 관계하며 근원적 시간성을 내포하게 되고, 행위의 현재 상태와 미래의 상태가 중첩된 상황에서 미래로의 기투Entwurf 로서 존재의 결단prohairesis 이 행위를 통해 그 자체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현재 상태와 우선적으로 관련하며 미래를 향한 숙고와 결단에 시의성을 가질 수 없는 이론적 고찰이나, 목적의 추구를 위해 존재를 도구화하는 포이에시스는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은폐할 뿐이다. 반면 실천적 지혜로 매개한 행위로서 프락시스는 행위의 여러 가능성 중에서 어느 하나로 규정하지 않고 ‘그저 행함’으로써 존재 그 자체가 드러남을 허용한다. 이는 특정한 목적이나 원리는 물론 방향성의 규정 자체를 거부하는 맹목적 실천론과도 분명히 구분된다.[5] 즉 우리가 이러한 ‘실천적 지혜’를 공유하고 단일한 목적 없이 행위 자체를 더 잘 실천하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면, 단체의 사회-내-존재가 스스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이로써 행동을 위한 제작으로서의 건축이자, 건축의 사회 내 드러남을 위한 행동으로서 프락시스의 의미가 정립되었다. 이제 이론적 고찰과 실천 행위는, 그 사이에 종속 관계를 형성하는 위계나 변증법적 통일에 대한 강박의 태도는 사라지고 긴장 관계만이 남아, 우리 단체의 사회단체로서 존재양식으로 공존하게 될 것이다. 우리 행동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 대한 이해를 지속적인 토론을 통해 심화하고, 실천에 적합한 인식틀과 방법론을 제시하는 ― 우리 활동의 핵심이 될 이 두 가지 축은 오로지 행위 그 자체의 좋음, 미래를 향해 있음, 그리고 사회 내 타자들에 대한 배려를 위해 기능하게 된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서 우리의 행위가 지니는 사회적 의의와 영향을 인식하고 건축가의 사회와의 관계를 재정의하며,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활동 자체가 사회 내에서 건축가가 자신을 드러내며 무규정적인 자유를 프락시스적 행동으로써 실현할 수 있음을 현시하는 살아있는 증거로 남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실천적 지혜에 속하는 제작poiēsis과 행위praxis를 구분하며, 이 둘 사이의 구분점을 목적의 내재 여부에서 발견한다. “(…) 실천적 지혜는 학문적 인식도 아니고 기예도 아닐 것이다. 학문적 인식이 아닌 까닭은 행위의 대상prakton이 다르게 있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2]이며, 기예가 아닌 까닭은 행위의 유genos는 제작의 유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실천적 지혜가 인간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에 관계해서 이성을 가지고 행위를 산출하는 참된 품성상태라는 것이다.[3] 제작은 제작[자체]과는 다른 목적을 갖지만, 행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행위의 목적은 바로 잘 행위한다는 것eupraxia 자체이니까.”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VI.1140b (강상진 등 옮김, p. 211) 참조. (강조는 필자에 의함)
[2] “‘학문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다르게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우리 모두는 생각한다. ‘다르게 있을 수 있는 것들’은 우리의 관찰 바깥에서 일어나는 경우 언제나 그것이 그러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학문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러하다. 따라서 영원하다.” 같은 책, VI.1139b (p. 208) 참조.
[3] 강상진 등(2011)의 원문에서 본문과 주석의 해석 중 이해를 돕고자 주석의 그것을 차용하였다. 본문의 “그렇다면 남는 것은 실천적 지혜가 이성을 동반한 참된 실천적 품성 상태로서 인간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에 관계한다는 것이다.”가 그리스어 원문에 가까운 번역임을 밝힌다.
[4] Vitruvius, De Architectura, I.3.
[5] “‘실천적’ 행동관계는 시각이 없다는 의미의 ‘비이론적’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론적인 행동관계와 구별되는 것은, 여기에서는 고찰되고 저기에서는 행동이 취해진다. 그리고 행위가 맹목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이론적인 인식을 적용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가 자기의 시각을 가지고 있듯이 고찰도 그렇게 근원적으로 일종의 배려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I.3.15. (이기상 옮김, p. 102) 참조. (강조는 원문, 기울임꼴은 필자에 의함)
참고문헌
이동수. (1999). 하이데거의 프락시스 해석. 한국정치학회보, 33(1), 129-147.
Aristotle. (2011). 니코마코스 윤리학. (강상진, 김재홍, 이창우 옮김). 길.
Heidegger, M. (1998).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원본 출판 1927년)
⸻. (1998).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이기상, 옮김). 문예출판사. (원본 출판 1975년)
⸻. (2001). Phenomenological Interpretations of Aristotle: Initiation into Phenomenological Research. (Rojcewicz, R., Trans.). Indiana University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in 1985)
Vitruvius. (1912). De Architectura. (Krohn, F., Ed.). Lipsiae. B.G. Teubner.